역사이야기

[스크랩] 과거 한국여성의 성 문화

88ace 2009. 12. 18. 12:59
성(gender)의 관점에서 본 한국역사와 종교 (I)
-고려와 조선초기의 한국 여성들-

들어가는 말

사회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성(gender)의 개념은 동시대의 인류 문명과 지성을 평가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점에서 동시대의 여성주의자들의 공헌은 제 2의 성,
즉 여성의 관점에서 인류 문명과 진화를 재조명하고, 기존의 제반 사회적인 인식들이
남성들의 관점의 산물이지 인류전체(여성과 남성 둘 다)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 인류의 관점이라고 총칭적으로 일컬어져 왔던 남성들의 관점들이 폭
로되고 그것이 여성 전체에게 끼친 해악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성의 관점은 상대화되었
고, 인류문명과 진화는 성의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새
롭지 않다. 쉽게 말해서,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고 일컫는 일반 개념들은 남성들이 일방적
으로 규정하고 사회화시킨 결과로 생긴 것이지, 자연적이지도, 신의 섭리도 아니라는 뜻이
다. 사회적 성(gender)의 개념이 시대와 문화,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일
은 우리가 자연의 섭리라고 영원히 고정시킨 관념들을 허물어뜨리게 된다.
한국역사와 종교 또한 사회적 성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었을 때, 그 동안 음양의 원
칙, 혹은 운명, 우주적 원리, 신의 섭리라고 믿었던 남녀 성에 대한 개념들이 흔들리게 된다.
한국역사를 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한국역사의 남성중심적 제도와 사
고, 윤리를 지적하고, 그것이 어떻게 여성들에게 억압과 폭력이 되었는가를 드러나게 한다.
따라서 성의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정신적인
혁명, 혹은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본인은 한국에 뿌리깊게
내려있다고 믿어지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삼종지도(三從之道) 등으로 요약되는 남성우월적,
여성억압적 윤리와 역사가 실제로는 그 뿌리가 그리 깊지 않음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느끼는 병세는 유교적 문화의 포만감에서 나온다. 너무나 유교문화에
젖어 있어서, 혹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유교문화로 인해서 유교문화와 다른 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 바로 한국인들의 문제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한국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결코 과거에 대한 애수(哀愁), 혹은 우수(憂愁)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진실한 과거가 드러날 때 그 방향이 제시된다.
현재 한국사회의 병폐를 성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대략 조선시대 동안 사회적으로
강요된 유교 이념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야말로 남성들에 의해서, 남성 자신들
을 신과 절대자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반면에 여성들을 종의 위치로 격하시켜서 남성들을
숭배하고 섬기게 하는 것이 정치와 윤리의 기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한국역사를 성
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면 고려 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시대와는 상이한 성의 개념과
윤리가 지배했다는 사실이 유력해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조선 유교시대는 500년
역사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gender)의 관점에서 본 조선초기 200년간은
유교관리와 통치자들의 법률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성계급 질서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조선초기 200년은 여성과 남성사이의 치열한 성간대결의 시
기로서 아직 조선 전형적인 유교문화와 제도가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조선
시대의 유교 역사는 중기와 후기에 뿌리내린 단지 300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
고자 한다. 조선 창립시기(139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의 200년간은 여전히
유교 성구조와 상이한 한국의 전통적인 윤리와 풍속이 우세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글은 고려시대와 신라시대를 성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재조명하면서 독자들의 기
존의 역사지식과 역사관점을 흩어 놓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역사가 조선중
기 이후의 유교적 관점을 가진 사가들이 검열, 삭제, 왜곡한 결과라는 것을 아는 사실은 분
노와 함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극단적인 남성우월적 관점으로 일관된 한국역
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들추어내는 일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이 덕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무엇인가가 아니다, 혹은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은 미운 오리새끼처럼 성가신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중기 이후
여성들을 극단적인 억압의 상황 속에 두고 사회적인 참여에서 배제시켜왔던 유교적인 성구
조(gender structure)가 신의 섭리도, 자연의 원리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
들에게 생소할 뿐 아니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gender)의 관점에서 한국의 중
세역사를 다시 쓴다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도 편한 일도 아니다.
성(gender)을 역사분석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한국역사
가나 독자들에게 생소한 일이다. 제 2부에서 쓰게 될 밀교라고 불리는 탄트릭 불교와 한글
운동을 통해서 보여진 중세기의 한국여성운동과 더불어서 이 글은 성(gender)의 관점을 기
존의 한국 역사학계에 적용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특
히 조선중기 이후의 유교적 사고로 일관된 한국역사를 배워온 우리들에게 내가 제시하는 서
양학자들의 고려사 연구는 너무 생소해서 적대감, 혹은 방어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려는 사람들, 즉 노동자나 농민, 혹은 억눌린 사
람들의 관점에 익숙한 사람들은 성의 관점, 그리고 특히 여성들의 관점에 대해서 조금은 쉽
게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있다.
이보다 더 큰 장애는 한국 지성인들조차도 '도대체 이 시점에서 한국의 중세 여성
사를 들추는 일이 왜 중요한가?' 하고 반문할 때 나타난다. 사회운동, 인권운동, 종교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나는 말문이 막힌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운동,
인권운동, 종교운동 자체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부터 재고(再考)해야 할 일이
다. 그런 질문은 나에게 또 하나의 글을 쓰게 하는 소재가 된다. 여기서는 한국인의 미래
는 한국 역사를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서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줄
이기로 한다. 덧붙여서,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사, 과거와 현
재를 통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한국인들이 한국 역
사를 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하자고 주장하는 바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이 지닌 장단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쉽고도
어렵게, 그리고 급하고도 천천히 쓰여졌다. 쉽고 급하게 쓰여졌다는 말은 독자들도 곧 파악
하겠지만 정식으로 학문적인 논문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어렵고도
천천히 쓰여졌다는 말은 이 글이 내 종교여성학 박사학위를 종합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2년
간의 집중적인 연구 끝에 40쪽 이상의 두 편의 영어논문을 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
식의 학문적 형식을 따르려면 내 영어논문을 번역했어야 했고, 그러려면 근시일 안에 한글
로 내 글을 소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럴 시간과 경제력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영어 논문을 번역하는 일도 그리 합당한 것 같지는 않다. 영어논문을 번
역한다면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는 그럴법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겠지만, 지식인들의 상아탑을
하나 더 쌓을 뿐이라는 회의가 성급하게라도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즉, 이 글은 학자들을
대상으로만 쓴 글이 아니다. 또, 나는 이 글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허락되는 조건하에서 학자들과 일반독자 둘 다를 겨낭하다 보니 이런 형식
의 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글의 방법론은 내가 주장하고 싶은 여성학적 학문의 방법이고, 또 서양에
서는 여성학의 연구방법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내 글은 그 동안 객관적인 관점이라고
믿어온 관점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남성 주관적인 관
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인식은 논리적인 이해와 더불어 감성적인 이해가 수반되었을 때 완
전한 지식이 된다는 여성주의적 인식론의 한 예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은 학
문적인 논문과 수필의 중간 형식을 띄게 되었다. 한가지 미흡한 것은 학자적인 관점을 전
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 글에 제시된 내용에 대해서 전문적인 인용이
나 검증이 필요한 사람들은 필자에게 개별적으로 영어논문을 제시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이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학자적인 관심이 아니라면, 독자들은 선택적으로 내가 이 글에서
인용한 책과 논문들을 찾아서 보충할 수 있다.
각주에서 일일이 쪽수를 밝힐 수 없는 경우는 첫 째는 내가 장황한 내 영문논문을
급하게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요약하고 부연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용한 대부분의 논
문들이 영문이라서 쪽수를 밝히더라도 한국어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내가
하는 주장들은 이런 책들과 논문들의 저자의 의도를 너머서, 거꾸로, 숨은 뜻을 찾아서 도달
한 결론들이라서 인용된 자료들 자체만으로는 내 주장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면, 나는 대부분의 기존의 학문적 자료를 저자의 의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물
론 예외는 있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마티나 도이츨러(Martina Deuchler)의 성의
관점에서 본 고려사회 연구와 여성주의 관점을 간헐적으로 수용하는 한국 저자들의 부분적
인 주장들이다.
이 글은 절대로 완벽하게 고정된 대결론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본인 혼자 힘으
로는 한국의 숨겨진 중세사, 고대사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특히 내가 한국 역사학자
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글은 결론이라기보다는 서론이요, 다른 역사
적 맥락과 무관한 고정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역동적
인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한국 중세사와 고대사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따라서 이 글이 내가 쓴 그대로 모두 정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한국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이 놓치고 있는 성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성불균형문제와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성불균형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한국 중세기의 성구조를 재조명하
는 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인 남성중심의 문화가 앞으로 어떻
게 균형을 잡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초기는 성대결의 역사?
본인은 조선초기 200년간의 역사는 과히 성의 대결이라고 일컬을 만한, 유교관리들과 특히
불교와 무속을 실천했던 종교 여성들 사이의 실제적인 패권싸움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남녀양성간의 패권싸움은 정치적인, 혹은 경제적인 권력을 두고
하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과시했던 중세의
한국여성들은 왕조가 바뀌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전통적인 지위와 역할을 박탈당하
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중세기까지 실천되었던 전통적 한국사회에서의 여성들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조선 초기 2세기 동안 유교 지성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실로 "여자들 길
들이기"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유교의 성이념에 고정된 유교관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
들은 사회적인 위치나 영향권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어서 이 유교관리
들이 귀족층, 왕족의 여성들과 치열한 패권싸움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어불성설
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 남성역사가들은 여전히 조선 초기의 가장 치열했던 성대결에
대해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교선비들이 왕들에게 쓴 상소문들을 뒤집
어서 읽어보면, 이 유교관리 남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여성들과의 싸움에 관련되어 있는가
를 알 수 있다.
조선초기 200년의 성대결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우선 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한
국역사를 성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요즈음에는 <왕건>이라는 TV 역사물에서 고려
시대의 여성들이 조선시대의 여성들과 어떻게 달랐는가를 가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은 극의 흥미를 주기 위해서 파격적으로 꾸며낸 이
야기가 아니다. 중세기의 여성들이 말을 탔다는 모습은 위에서 언급한 유교관리들의 상소
문에서도 드러난다. 그 한 예로 불교 여성운동을 했던 귀족층, 왕족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여승들의 사찰에 말을 타고 다녔다. 무리의 여성들이 말을 타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나가는 장관을 보기 위해서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자면서 그 행렬을 기다렸다
는 기록이 나온다. 또 다른 기록은 중세의 여성들이 유교 관리들에 의해서 실제로 어떻게
말에서 끌어 내려졌는가에 대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조선초기 의복에 대한 규제가 중국의
유교관제에 따라 정해지면서 의복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는 여성들에게 말을 탈 때는 치마를
입지 말고 말건이라고 불리는 바지를 입으라고 명하였다. 이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의복의 예를 관장하는 한 정부관리가 술이 한잔되어서 길을 가다가, 한 여성이 치마를 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기생이겠거니 생각하고 (기생들은 말을 타는 의복의 규제에서 제외되었
다) 하인을 시켜서 그녀가 말에서 내려서 자기가 지나는 동안 엎드려 있도록 종용했다. 그런데 그 하
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녀가 기생이 아니라 모 선비관리의 부인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러자
유교 관리는 그 부인에게 손수 달려가서 머리채를 잡아 쥐고 말에서 떨어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자인 주제에 감히" 유교 관리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이 이 술취한 유교
관리의 신경을 단단히 거스른 것이다.

고려시대의 여성들과 한국 전통적인 성애(sexuality)와 성(gender)관습
그러면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조선 후기의 여성들과 어떻게 달랐는가? 이것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진전되어야 할 일이고, 또 장황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만 들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내 연구는 주로 마르티나 도이츨러(Martina
Deuchler)의 <The Neo-Confucian Transformation of Choson Korea>라는 책과 박영규씨
의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기록서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간접적인 자료로서는 이미 위에
서 인용된 바 있는 숙명여대에서 펴낸 후 영문으로 번역된 <이조시대의 여성들>이다. 이
책은 유교관리들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들은 조선초기와 고려시대의 여성상황에 대해서 우회
적인 자료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다음에서 말하는 본인의 주장들은 성
의 관점에서 이 몇 가지 자료들만 상세히 들여다본 결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80
년대 말 한국을 방문하면서까지 한국 중세사를 연구했던 스위스 여성학자 도이츨러의 책의
핵심적인 요소만 들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도이츨러는 한국의 역사자료가 조선시
대의 유교적 관점에서 기록된 소수의 역사서를 제외하고 고려사회에 대해서 거의 알려주는
것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중국 자료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첫째, 고려여성들은 결혼 유무에 관계없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다. 고려시
대의 딸들은 아들들과 동등한 재산권이 있었고 결혼을 해도 그 권한이 박탈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상습제도는 분명히 부자상속이 아니었다. 자매, 형제 상속이라고 해야 옳을 것
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접하는 상속제도는 공무원이나 왕권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중국
의 관제에 따른 것으로 부자 상속의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왕권의 상습만을 보더라도 절
대적인 부자상속에서 예외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부모들은 자신들
이 쓰던 작은 것들이라도 자녀들에게 상속시켜서 물려주었다는 점은 조선시대의 관습과 상
이하다. 조선시대는 부모라도 고인의 유품은 불태우는 것으로 되어있지 않은가? 고려시대
의 부모들은 상속의 규칙에 따라서 자신의 물건들을 자녀들에게 상속했다. 어머니는 자신
의 유품을 자의에 따라서 자녀들에게 상속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런 상속권한은 조
선시대 아버지의 상속권한에 비하면 막강한 영향권을 가지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둘째로, 결혼제도는 처가 중심의 풍습이 더 우세하게 지켜졌다. 여자들이 결혼 유
무에 관계없이 상속권이 남자 형제들과 동등하다는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시 말하면
고려여성들은 결혼에 의해서 경제적인 상황이 변동되지 않았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우세한
결혼풍속은 처가중심의 결혼이었고, 자신의 유산이나 가세가 빈약한 남성들은 결혼하고 처
가살이를 했다. 이 처가중심의 결혼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그 집안의 한 일원이 되
는 제도를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서 한 일원이 되는
결혼풍속과 비슷한 다만 삶의 근거를 옮겨가는 성이 바뀐 제도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
시대의 처가중심의 결혼제도는 조선시대의 결혼풍속과 상이하다. 신부의 집의 한 일원이
된 신랑은 신부의 남자형제들처럼 한 일원으로 존중된다. 비록 그 부부의 상속은 부인이
받는 것이 정식이지만 남편이 장인의 재산과 권한을 상속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고려시
대는 신라시대의 풍습을 전수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신라와 고려의 왕권상습을 면밀히
고찰하면 왕권조차도 사위에게 이전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
만, 모계적 계승을 했던 고려와 신라는 일찍이 엄격한 부계중심적 사회제도와 풍습을 확립
시킨 중국왕조들에게서 압력을 받았고, 따라서 한민족은 일찍이 중국 관제를 받아들여서 일
종의 타협적인 외교 효과를 얻는 정책을 취하였다.
여기서 장황하게 고려의 처가중심의 결혼풍습과 조선시대의 시가중심의 결혼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지는 않겠다. 성의 관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이 두 결혼제도
는 현시대의 한국인들에게 이해될 필요가 있고, 여전히 한국 부부들이 부모와 동거하는 대
가족제도를 선행한다면 처가중심의 결혼제도도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처가중심의
결혼제도가 시가중심의 결혼제도와 병행해서 선택될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한국인들이 한
국전통을 살려서 가꾸어 나가는 일이 되고 성의 불균형, 여성억압의 문제를 극복하는 큰 걸
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처가중심의 결혼을 택한 고려 남편들은 시가중심의 결혼을 택한
조선여성들의 상황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가장 다른 점이 이들 부부들은 처가
로 갈 것인가 시가로 갈 것인가의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고 자신들의 처지에 맞는 선
택을 할 수 있었다.
고려의 처가중심의 결혼풍속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데릴사위제와는 차이
가 있다. 데릴사위제는 사위감이 될 신랑을 어릴 때부터 처가로 들여와서 자식처럼 대우하
였던 제도이다. 따라서 데릴사위제는 이 처가중심의 관습의 한 특수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처가중심의 결혼풍속이 성행했던 만큼 고려시대의 자녀들은 자연히 처가의 가족들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부가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다시 남편의 집으로 가는 경우
도 있다고 한다. 처가에 계속 머무르는 경우에도 자녀들은 처의 부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가 중심의 결혼제도가 성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도이츨러(Deuchler)는 시
가중심의 결혼풍속과 처가중심의 결혼풍속 둘 다 실천되고 있었지만, 처가 중심의 결혼 제
도가 사회적으로 더 성행했다고 본다. 그래서 고려인들의 속담 중에는 "사위가 어떻게 장
인을 배신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 만큼 사위와 장인은 한 집에서 생존과
번영을 같이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친척과 가족으로 이해되는 범주가 중국과는 달리 항상 처가와 모계의 관계
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친척과 가족은 엄격하게 부계 중심이다. 중국을 외
면적으로 표양하는 고려는 중국의 범주를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중국과는 분명히 달랐다.
즉, 정확히 부계와 모계를 다 포함시키지는 않았어도 항상 처가와 모계의 친척과 조상들을
가족의 범주에 넣었다. 상을 당해서 애도하는 기간에서도 항상 모계와 처가의 친척들을 포
함시키고 그 예를 갖추었다.
넷째는 고려시대는 모계의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의 성을 따르는 것이 관례로 보이지만, 딸인 경우는 모계의 성을 따랐던 관습은 왕건의
가족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왕건은 결혼을 통해서 정권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여성들과 결혼을 했고, 자신의 자녀들을 서로에게 결혼시켰다. 다시 말
해서, 고려시대에는 배다른 아들, 딸이나 모계의 사촌들끼리 결혼했다. 이런 관습은 절대적
으로 조선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도이츨러의 연구는 박영규씨의 역사서와 일치한다.
배가 다른 형제자매끼리의 결혼, 모계의 사촌들 사이에서의 결혼관습은 고려 이전의 신라에
서 비롯된 한국 고대사의 전통인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출판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
야기>라는 책은 신라인들이 풍습과 사고들을 신라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내 견해로 이종욱씨의 신라인에 대한 이해는 상이한 전통을 쌓아왔던 신라시대
의 성애(sexuality)에 대해서는 성공적으로 동시대의 한국독자들을 일깨우고 있지만 성
(gender)의 관점에서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현시대의 한국인들에게 상이한 한국 고대사회
의 성(gender)구조와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라와 고려사회에 대한 이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여전히 수수께끼같은 의문을 남길 것이다.
고려인들의 결혼풍습도 고려인들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교적, 기독교적
시각으로 보면, 고려인들은 도덕적인 폐륜아요 미개인들로 보일 뿐이다. 일찍이 가부장적으
로 사회와 풍습을 제도화한 중국인들이 바로 한국인들에게 손가락질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의 고대와 중세왕조들을 중국관제를 약간 모방하면서도 한국 전통적인 제도를
폈다. 그래서 신라는 천 년, 고려는 오백 년간 정치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고의 침입과 지배를 경험한 한국의 지성인과 정치인들은 전적으로 중국
의 패권에 승복하게 되어 사대사상을 자신들뿐만 아니라 조선왕국 전체에 확산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한국의 고대사와 중세사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의 영향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신라와 고려의 모계, 혹은 여성중심적인 사회풍속이 그 실
권을 잃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한국의 여성들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 연구의 가장
큰 장애는 충분한 역사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간접적이며 우회
적인 자료를 통해서 중세 여성들의 상황을 연역적으로 추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고려 중기, 후기로 가면서 다음과 같은 모계 성을 따르는 기록을 접하게 된다. 백성들의 성
이 왕과 같을 경우는 왕이 어머니의 성을 따르라는 지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
에서 부계 성을 따르는 풍속은 그 기원이 아득하겠지만 고려의 시조 왕건조차도 자신들의
자녀들이 혈족내의 결혼을 하는 경우에 딸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이름만으로는 동성(同
姓)의 결혼이라는 흔적을 피할 수 있었다. 왜 굳이 딸인 경우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자신
의 이복형제들과 결혼을 했는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일이다.
고려인들의 성애(sexuality)에 대한 사고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다. 중국 송나라
사신의 한 기록에 의하면, 고려인들은 여름에 강가에서 남녀가 함께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
는 기록이 나온다. 동시대의 한국인들은 일본에 여전히 혼욕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
연해한다. 조선시대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고안했던 조선시대의 부정적인 성애에
대한 관념을 고정시켜온 우리들은 일본인들의 혼욕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
대 바로 이전까지 그것이 한국의 풍습이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
지만, 일본의 혼욕관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관리들이 고려의 풍속이 성적으로 극도로 문란했다고 비난하는 상
소문들을 이 분야의 저술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성애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금
기시했던 유교적 사고로는 고려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애관념까지도 퇴폐적으로 보일 수밖
에 없다. 특히, 여자들이 마음대로 성을 누렸다는 사실은 유교관리들에게 있어서는 안될 금
기사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유교관리들의 고려인들의 성애관에 대한 비판을 이
해해야 한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자유롭게 구애하고 청혼했다. 물론 남아있는 어느 기록
도 단적으로 이렇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박영규씨의 간략한 고려왕조
기록만 보더라도 고려 귀족층, 왕족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성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정
치적 영향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의 여성들의 성애관을 잘 말해준다. 이혼도 자
유로워서 서로 합의하면 각자 저고리의 안쪽 끝을 잘라서 교환함으로써 헤어졌다고 한다.
여자들의 당당한 구애는 내가 위에서 지적한 책들에서 자주 눈에 뜨인다. 박영규
씨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일화를 쓰고 있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여인이 자신의 정부를 궁
중에 부르고 아들이 죽자 정부를 왕으로 앉히려는 계획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 고려 여인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TV 역사물 <왕건>
에 나오는 궁예의 부인의 경우만 해도 야사에 의하면 그녀가 궁예에 의해서 죽은 이유가 궁
예를 위협하는 정치적인 세력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초기의 사건이기는 하지
만, 유교의 여성 억압에 반발하는 양반가 여인들이 아버지나 남편이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
기고 한양으로 가서 매춘을 하였다는 기록은 중세시대의 한국여성들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
가 많다. 이는 유교적 성억압에 정면으로 저항한 조선초기 여성들의 자발적인 투쟁이 현저
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보인다. 다른 시각에서는 고려여인들의 자유로웠던 성관습을 조선여
인들이 계속했다고도 이해된다. 어우동 같은 양반 여인들의 "성반란" 일화는 조선초기에
흔하게 나타난다. 믿기지 않는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책 <이조시대의 여성들>을 보라.
나는 이 여인들이 조선 유교관리들의 여성억압적 법률과 여성에 대한 윤리적 사형선고에 대
항해서 고려 여인들의 풍속을 계속 해나갔다고 본다.
끝으로, 고려여인들이 이혼 뿐 아니라 재혼, 삼혼을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고려왕
들조차도, (심지어 조선초기의 태종조차도 과부를 왕비로 맞았다) 재혼녀와 쉽게 결혼했다는
기록은 여성들의 재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고려 여인들은 자녀들
을 데리고 재혼, 삼혼을 했다. 조선 초기의 유교 관리들이 여자들의 재혼, 삼혼을 막기 위
한 노력이 결코 쉽지 않았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것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간략하게
신라시대의 한국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신라시대의 여성들과 한가위 축제의 기원
위에서 살펴본 고려의 역사를 연장하면 신라시대는 더욱 더 모계 중심, 혹은 여성중심의 사
회풍속이 유지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학자들 스스로에 의해서도 이 사실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임병주씨는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에서 신라의 시조가 되는
혁거세가 실제는 알영이라는 여성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론을 조심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시조왕 혁거세거세간 뿐 아니라 2대왕 남해차차웅이나 3대왕 유리이사금등이 사실은 여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유리이사금의 경우는 지금의 팔월 한가위 명절의 원
조가 되는 가배놀이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가배놀이란 다름 아닌 여자들이 길쌈을 하는
대회요 축제였다. 임병주씨는 이렇게 쓴다:

유리왕은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월 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이라고 한다. 가
배놀이는 이후 우리 고유의 공동체 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의 모태가 되었고, 이것이 후대 여성 집
단에 이전되어 원화(原花)로, 남성 집단에 이전되어 화랑(花郞)이 되었다(329).

임병주씨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

유리왕은 6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눈 뒤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짝을
만들어서 7월 16일부터 날마다 뜰에 모여 밤늦게까지 길쌈을 하게 하고, 8월 15일에 그 결과를 살펴
진 편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하게 하고는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다. 이것을 가배놀이
라고 했고, 지금의 한가위 명절의 원형이다 (330).

팔월 한가위에 대한 기원을 아는 일은 우리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가위는
여성들의 놀이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가위는 유교적 제례에 의해서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
어지고 있으며 여성들은 남자 제사장들의 제례음식을 만드는 하녀에 불과한 위치로 전락되
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결혼한 여자들이 시댁에서 모이는 제사나 명절을 싫어하는 이유
가 그 여자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튼 팔월 한가위는 여자들이 한달 전부터
길쌈 대회를 한 결과를 평가하는 날이요 음식을 먹고 즐기며 춤추며 노래하는 축제일이었
다. 7월 16일부터 밤마다 여자들은 길쌈을 했고 그것이 그들을 한 덩이의 공동체로 묶게
한 행사였다. (이 기록에는 남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신라 가배
놀이의 주체적 인물들인 여성들은 현대적 팔월 한가위 명절에서 완전히 비가시적인 하인의
위치로 전락했다. 한가위 명절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것도 한국 여성들에게 잃었던 주체적
역할을 되찾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들이여, 신라 한가위의 정신을 새로 찾고 싶
지 않은가? 그리고 남성들도 여기에 즐겁게 동참하고 싶지 않은가? 우월감에 가득 찬 이
지러진 유교적 제사장의 얼굴로 여자들의 한가위 명절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보다 더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잊혀진 신라여성들의 정치적, 종교적인 집단인 원화(原花)는 화랑(花郞)의 전신
가배놀이의 정신은 여성집단인 원화(原花)와 남성집단인 화랑(花郞)의 집단으로 계승되었는
데, 우리의 교과서적 역사는 화랑에 대한 이야기만 전해줄 뿐 원화의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
는다. 사실 화랑이라는 단어는 원화와 화랑 두 집단을 총칭적을 일컫는 말이다. (원화의
화와 화랑의 랑이 합쳐진 단어가 화랑이다.) 따라서 화랑이라는 단어는 원래 남녀집단 둘
다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에 남성들의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천한다. 화랑들
이 곱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무예뿐 아니라 심신을 수련하는 종교적인 단체였다
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화랑전통은 더욱 여성집단인 원화에서 기원한다
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려움은 우리에게 원화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김대문의 저서로 알려진 <화랑세기>에 의하면 원화는 540년 진흥왕 때 폐지된 것
으로 알려진다. 유리왕의 재임기간이 24-57인 것을 감안하면 원화는 적어도 500년 이상
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근 50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여성들의 집단 원화에 대해서 <화랑
세기>는 자세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김대문의 저술은 그 당시 신라에 팽배해가는 남성중심의 편견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화랑세기>는 그 긴 기간의 원화들의 행적이나 일화들을 모두 생략하고 마지막 원
화들이었던 남모와 준정이 서로 질투한 나머지 준모가 남모를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원화
들의]원화들이 시대가 끝났다는 짤막한 기록만 남겨준다. 물론 김대문이 이 사건들을 조
작하여서 기록한 것은 아니다. 이 즈음의 정치적, 종교적 여성지도자들간의 분열과 암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오히려 동시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여성들간의 화목과 단합의 사실이
더 믿어지지 않는 것이 가부장제의 현실이다. 이 여성들의 분열과 암투를 전적으로 신라남
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일도 적합하지 못하다. 신라 왕조 또한 당시 중국과 인도 중심의 국
제 사회에 협력하면서 생존해야 했는데, 중국이나 인도는 그야말로 남성들의 문명의 발상지
로 알려진 나라들이 아닌가? 중국은 이미 기원전 6-5세기 경, 노자와 공자가 나왔을 때 이
미 사회는 가부장제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신라도 서서히 국제적인 체계에 영향을 받았다
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김상일씨가 지적하듯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국가들이 실제로
인류문명을 시작했다기보다는 남성중심의 문명을 시작했다고 본다. 차축시대(axial age)
라고 불리는 기원전 8-2세기 경 인류역사의 특징은 남성중심의 문명의 시초라는 지적은 또
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 남성문명은 여성과 협력하고 공조체
제를 이루는 문명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여성들과 여신들이 쌓아온 인류문명, 특히 여
성들이 누리던 사회, 정치적 지위에 대한 파괴와 말살, 조작과 허위기술의 역사를 말한다.
서구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여성과 여신들을 강간 살해하고 남성과 남성신들은 자신들
의 문명을 세웠다. 따라서, 그것이 자연이나 동물, 여성에 대한 것이든지 간에, 전쟁과 대결
로 성취된 남성문명은 성공적으로 인류의 정신에서 고대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도록
의도하였다. 이것은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인류학적 발굴에 기원을 둔 역사연구로 주장된
사실이고, 동양에서도 이런 사실들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놀랍게도 중국의 홍산문화 문명
은 서구의 여성학자들의 발굴과 역사해석과 일치하는 새로운 고대역사를 알려준다. 줄리
아 칭(Julia Ching)에 의하면, 기원전 4,500-2,500 경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지에서 임신한 여
신들의 작은 상들이 옥용(玉龍), 거북이, 새, 매미 등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이 유적지에서
가까운 북서쪽의 유적지에서는 실물 크기의 여성두상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3000년으로 추
정되는 이 두상은 중국의 여신숭배 문화의 증거가 된다고 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는 논지는 김대문이 신라의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몰락
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대문의 역사관점은 남성우월적인 관점을 당연히
받아들이면서, 그 당시 신라 안에서 일어나는 성간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 침묵했다는 점이
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남성 사가들이 범한 실수이기 때문에 김대문 자신의
고유한 실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김대문의 고유한 실수라기보다, 모든 남성중
심적 사가들의 한결같이 범하는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것이 신라사회
연구의 주요한 자료가 되는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에게 여성주의적 비판을 하지 못한다
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화랑세기>가 비의도적으로 노출하듯이, 중국과는 달리 신
라인으로서 신라 여성들의 영향력이 사회적으로 제압되고 저지되는 변화의 시기를 성의 관
점에서 질문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가 지닌 뚜렷한 남성우월적 관점을 지지해준다. 그는 적
어도 신라 여성들이 중요 관직과 종교 지도자의 위치에서 밀려날 때,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
서 질문을 했었을 수 있다. 그래서 신라가 얻는 득과 실을 헤아려볼 수도 있었고, 여성들의
신분하락이 가져올 신라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으로서 얻을
자신의 이익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신라 원화들의 문제를 몇 줄의 사건으로 종결시켜버린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신라 여성들은 한국역사에서 소멸된 것이다.
그러나 김대문은 완전히 신라여성들의 이야기를 삭제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신라 여성들은 막강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김대문 자신이
<화랑세기>에서 이런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미실낭주가 왕의 총애를 입자 벼슬이
각간으로 승진되었고, 묘도부인도 궁주가 되어 대원신통을 이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 조기영 편집자는 각간이 "이벌찬과 같은 관작으로 신라 관등 17등 가운데 제 1위에
해당한다"고 쓰고 있으며, 대원신통이 신라의 골품제도의 하나로서 진골정통(정통왕족)보다
는 못한 신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실낭주는 현대의 국무총리 격이고, 묘
도부인은 장관급의 신분이다. 신라의 여성들이 이런 직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현시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참신한 충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왕조가 여성들로 시
작되었고, 여성황제들을 셋이나 두었던 신라여성들에게 미실낭주와 묘도부인의 신분은 직위
상승이라기보다는 직위하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화와 같이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쇠퇴해가는 시점에서 신라여성들은 여성들의 전체 성에 서서히 가해지는 압박과
몰락을 느꼈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역사와 더불어 삼국통일을 전후의 신라역사는
성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화랑세기>가 여성들의 관점에서 원화들의 활약과 공헌을 서술할 수 있었기를 기
대하는 일은 너무 어리석고 순진하다. 김대문의 <화랑세기> 저술 년도는 681-687로 추정
된다(임병주씨는 702년으로 추정). 원화가 폐지된 지 거의 120년 이상이 지나서 김대문은
화랑들만의 행적을 남기는 저술을 했다. 풍월주 중심의 화랑도가 681년에 폐지되었고, 그
후로 국선 중심의 화랑도가 부활했다고 하는 장황한 기록 가운데서 소멸된 원화들의 이야기
는 되찾아야 한다. 아무리 생략한 역사라도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 원화들이 신라초기
5백년 동안 활동했다는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앞으로 신라역사 연구는 여성주의 관점에
서 고찰되는 것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원화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일은 현재의 한국문화의
새로운 성(gender) 문화와 질서를 제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라가 세계 역사상 유래없이 천년왕국을 지속했다는 점이나, 신라에 여왕이 셋이
나 있었다는 점, 또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는 점, 또 신라
는 11세기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시에서도 인용되고 있다는 점들을 들면 신라라는
나라가 지금의 한국역사에서 알려진 것 이상의 어떤 강력한 특징을 지녔다고 상상하게 된
다. 이것은 중국 여성들의 상황이 특히 명나라(1573-1644)와 청나라 초기(1644-1722)에 급
격하게 사회적으로 악화되었다는 중국 여성학자 도로티 고(Dorothy Ko)의 말과 일치한
다. 즉, 중국에는 송나라(960-1279)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상속권이 있었고 재혼할 수 있
었다고 한다. 중국역사 속에서의 여성들의 상황은 내가 이 글에서 제시하는 한국역사 속에
서의 여성들의 상황과 정확하게는 일치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부합한다. 따라서 신라나
고려 사회에 조선과 같은 강압적인 여성억압제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옳지
않다.
신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한국 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고무적이다.
최근에 출판된 <단군할머니론>에 의하면 어떻게 신라의 진덕황제나 진성황제가 역사가 김
부식, 화랑이자 후에 왕이 된 김춘추 같은 인물들에 의해서 중국의 일개 속국의 "여왕"의
지위로 격하되었는지에 대해서, 또 어떻게 이 여황제들의 여성 전체에 가해진 추락의 도도
한 물결에 대처했는가를 상세히 읽을 수 있다. 신라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무조건적으
로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았음을 상상해보라. 독자는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이
저자가 여성주의자라고 믿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라 시기에는, 고려와는 또 양상이 다르
게,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서 사회적인 권위와 영향력에서 밀려나는 역사
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신라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는 미개척분야이고 또 신라의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조선초기의 성대결과 여성들의 유교통치에 대한 저항운동
이제 조선초기 2백년간의 여성들의 투쟁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은 제 2부에서 다
루게 될 조선초기 여성들의 밀교라고 불리는 탄트릭 불교운동과 그리고 한글운동과 더불어
서 이해되어야 정확한 실상에 가깝다. 따라서 제 2부에서 다시 종합적으로 언급하고자 한
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초기 여성들은 유교적 성계급 제도에 유교 선비관리들과 정면으
로 대결하였다. 물론 이 여성들의 세력이 단일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나 조직력을 가지고 있
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은 산발적이고 국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조선 초기
여성들의 유교 성계급 반대 투쟁운동을 읽어내는 데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외부인의 사
회"같은 눈이 필요하다. 울프는 <세개의 기니>에서 일찍이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외부인이
기 때문에 이들의 조직은 비가시적이고, 비조직적이고, 비능률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사회
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라고 주장했다. 울프의 눈이 고려말, 조선초기의 한국 여성들의 운동을 읽어내는데 필수적
이다. 여전히 이 중세 한국 여성들의 투쟁은 비가시적이라서 눈이 밝다고 자타가 주장하는
학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중세 여성들의 운동은 <이조시대의 여성들>이라
는 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발견할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조선초기 여성들은 우선 유교적 윤리와 법의 위협 하에서도 재혼, 삼혼의 고려 풍
속을 계속 했다. 그러자 유교 관리들은 재혼한 여성들의 이름을 "찬여안"이라는 명부에 올
려서 간음의 죄를 범한 여자들이라는 윤리적 낙인을 찍었다. 그래도 여성들의 재혼, 삼혼을
막을 수 없자, 성종은 재혼, 삼혼한 여자의 자손들은 관직에 응할 수 없게 하고 이미 관직에
있는 자는 관직을 박탈하는 법으로 대응했다. 이것이 인륜에 거스르는 죄라는 것을 성종과
유교학자들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여자들의 재가는 이제 그 자손들이 반대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미 재가한 여자들은 관직에서 쫓겨난 자손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결과 과부들은 재가하지 못하게 되고 유교적 성계급의 피해자가 되었다.
양반가 부인들의 성적 반란은 과히 화려하다 못해서 비극적이다. 일군의 여성들은
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을 해방의 소식으로 알았다. 어떤 여성들은 아프다고 말한 뒤 훌쩍
집을 떠나서 혼자 한양으로 가서 자유로운 성행위를 했다. 고려시대의 양반가 여인들이 말
을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성들이 혼자서 한양으로 가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우동과 같은 양반가 여성들을 수 십 명 이상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왕들과 유교 관리들의 처벌은 엄청났다. 예를 들어서, 세종대왕의 재위 초기의 이런
자유로운 성행위를 계속하는 여성들에 대한 심판은 아주 가혹해서 참수하기 전 사흘동안 시
내 복판에 묶어서 전시했다. 이와 비슷한 법적인 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계속
해서 저항했다. 또 다른 여성들은 가사일과 남편이 자신들의 병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무
속이나 불교를 찾았다. 이 여성들은 무당의 집에서 조용히 근신한 것 이 아니라, 굿을 해
자신에게 들린 악신을 쫓아내고자 했으며, 가수와 춤꾼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풀어 잔치를
하고 몇 날 며칠 밤과 낮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세 여성들의 모습은 조선 300년
의 유교 성이념에 의해서 세뇌된 여성들의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남편, 혹은 남성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들이 눈살 찌푸리는 일을 하기
꺼려하지 않는가? 하지만 중세 한국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
다.
15세기는 실로 유교남성들과 왕족과 양반가 여성들의 성대결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제 2편에서 종교와 한글과 관련한 여성운동을 다루기로 하고 여기
서는 비종교적인 여성들의 투쟁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과부들의 재혼, 삼혼을 윤리적
으로 제도적으로 막은 유교관리들은 이제 여성들의 성행위 자체를 막아야 했다. 김용덕씨
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 때는 세 명의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쓰고 있다. 1423년 이기산의 아내로만 알려진 여성은 간음의 죄
로 앞서서 언급한 대로 세종이 참수하기 전 사흘동안 시내 한복판의 길에 전시했다. 1427
년 한송윤이라는 검사의 딸로 알려진 여성은 "창부"로 행세한 죄로 처벌되었고, 1433년 오
리가라는 이름의 여성은 평민의 옷을 입고 자유로운 성행위를 했다고 쓰고 있다. 물론 우
리에게 전해지는 기록은 양반가의 여성들의 것이다. 이 양반가의 여성들이 자신의 양반신
분을 버리면서까지 자유로운 성행위를 택했다는 사실은 동시대의 여성들에게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초기 여성들이 유교관리와 정부의 여성억압정책에 반대하여 성적인 반란을 일
으켰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반면에,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양반가 여
성들은 조선중기 이후의 양반가 여성들과 같은 규범이나 제도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정신생활을 일일이 예(禮)라는 이름으로 고정시킨 조선의
유교적 예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조선초기 한국인들은 여전히 고려의 전통 속에
서 살았을 것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조선초 양반가 여인들의 자유로운 성애표현은 한국의
전통을 고수했던 행위였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전통 혹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실권을 지키려는 양반가 여인들은 여성존재를 성애자체로 보고 남자의 성행위와 자손번식이
라는 목적으로만 묶어두려는 유교관리들과 정면충돌하는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연구는 고려시대와 그이전 시대의 한국역사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여
성문제는 조선시대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면 한국여성사 전체를 오해하게 될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은 그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불교학자 권기종씨는 세종은 재위 후기에 불교와 여성과 대한 정책에 변화를 보였
다고 쓰고 있다. 세종이 불교에 전념했던 그의 아내 소헌왕후가 별세한 뒤 왕실에 불당
을 지었고, 1446년 한글 반포 후 둘째아들 수양대군(후에 세조가 됨)에게 불교가사인 "월인
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번역해서 출판하게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이라는 정부산하의
출판부를 설치하여 불교와 한글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나는 탄트릭 불교를 실
천했던 여성들의 세조의 불교정책 이전에 이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활동으로 한글
운동을 꽃피우게 했다는 점에 대해서 제 2편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더 나아가 제 2편
은 다음의 삼자(三者): 종교(탄트릭 불교와 무속)와 유교정부에 의해서 구속받게된 조선초기
의 여성, 한글보급을 통해서 깨어난 여성지성의 유기적인 관계를 다룰 것이다.
성종(재위 1469-1494)은 이전의 왕들이 외유내불(外儒內佛)의 정책과 달리 전적으
로 유교적인 정책을 폈다. 이것은 유교적 제도가 국가적으로 자리잡는데 성종의 공헌이 큼
을 말하며, 유교관리들의 정치적인 패권을 의미하며, 한국여성들에게는 여성억압적 성
(gender)구조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시기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한국문화와 제도의 유교적
단일화요, 한국이 이미 멸망한 중국 송나라의 전통을 잇는 정통국가로 자리잡는 계기요, 한
국이 유교관리들의 왕국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시기임을 말한다.
박영규씨는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의 생애를 간추려서 쓰고 있
다. 결국 성종은 철저하게 국가적으로나 성종 개인 자신에게나 유교적 가정이 겪는 비극을
자아낸 장본인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어느 왕보다 더 많은 왕비를 두었던 성종은 정비
윤씨의 질투를 사서 얼굴을 긁히는 사건을 맞게 된다. 그것을 본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는 윤씨를 폐비시키고 궁궐에서 내 쫓는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종을 속여서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만든다. 그야말로 한국인에게 친근한 고부간의 극심한 갈등의 패턴이 여
기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유교적 가정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종이 궁정에서
윤씨의 사건을 아들 연산군에게 비밀로 붙였기 때문에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비극
을 알 리가 없었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연산군이 한국 역사상 유래없는
폭정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영규씨는 연산군의 성격을 어려서부터 난폭하고 잔
인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연산군은 유교적 결손가정에서 자란 첫 번째의 전형적인 폐륜아
였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생모에 대한 사실이 밝혀졌고, 화가 난 연산군은 할머니를 머리
로 들어 받아서 소혜왕후가 사망했다고 박영규씨는 쓰고 있다.
김용덕씨와 유원동씨의 글을 종합하면, 성종이 여성들의 성행위와 유교 이외의 타
종교 실천, 과부의 재혼 등을 제도적으로 막은 사실에 대해서 자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성종의 시기에도 여성들의 성적 반란은 계속 되었다. 바로 어우동 혹은 울자동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자유로운 성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성종은 울자동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조선초기 여성들의 "자유연애"에 대해서 철저히 처벌하였다. 또한 첩이 된
용해왕자의 아내의 어머니도 처벌되었다. 물론 자유연애로 처벌된 사람들은 남성들이 아니
라 여성들이다. 조선초기 왕들에게 쓴 유교관리들의 상소문은 거듭해서 과부가 된 여성들
이 자기 중매로 (다시 말하면, 자유연애요 여성들에 의한 구혼) 재혼, 삼혼을 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다. 이것을 뒤집어서 읽으면 조선초기까지의 한국여성들은 애인들에게 자유롭
게 구애하고 청혼했다는 말이 된다.
성종 이후 왕실은 유교적인 가족관계로 전환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뿐 아
니라, 국가적으로도 한국문화는 유교적 색채로 단일화되었다. 김용덕씨는 중종(재위
1506-1554)은 "음란한" 여성들을 사형에 처했고, "창녀"들이 엄격하게 처벌되었다고 쓰고 있
다. 여성들이 자신을 위한 성행위를 하면 모두가 음란하다고 간주되었으며 그런 여성들
은 모두 창녀로 취급되었다. 재혼녀는 전국을 두고 수배되었으며, 그 자손들의 관직과 관직
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재혼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렇게 법
률적인 제재와 윤리적인 처벌이 강화되자 조선초기의 양반가 여성들도 차츰 그 반항세력이
[을] 줄어갔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유교관리들의 여성억압과 싸운 여성들은 왕족의 여성들
과 왕비들이었다. 조선이 그 역사를 진행하는 동안 실질적인 패권싸움은 유교관리 남성들
과 왕족의 불교여성들의 투쟁으로 뚜렷해진다. 이것은 제 2편에서 더 다루고자 한다. 마침
내 서서히 조선초기의 여성들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의 성은 결국 남성과 자손번식을 위해서
만 사용되어야 올바르고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유교적인 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되었
다. 나는 이때부터 한국 여성들의 성애가 남성들을 위한 도구로만 고정되는 문화가 정착되
었다고 본다. 그리고 400년 정도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 여성들은 성애가 그 자체로 복된
것이요, 성애는 여성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인간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
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조선왕조의 자부심: 유교관리들의 일본과 중국에 대한 패배를 자국의 여성들에 대한 성
(gender) 전쟁의 승리와 정복으로 대체한데서 나온다?
김용덕씨는 명종(재위 1534-1567)때의 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잉화도로 불리는 섬이 지금
은 어느 지방에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이 섬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양과 염소를 기르면
서 전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한국전통은 유교관리들의 눈에 거스르는 것
이었다. 이들은 사촌이나 친척과 결혼하는 풍습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고, 과부들은 홀아비
들과 결혼을 했고 여성들과 남성들과의 성관계가 자유로웠다고 한다. 이 사실은 1556년 조
선 당국에 알려졌고, 정부는 공무원들을 이 섬으로 보내서 집들을 강제로 무너뜨렸을 뿐 아
니라, 이 섬에 오로지 남자들만 남아서 양을 치게 했다. 그리고 이 섬으로 다시 돌아오는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심하게 처벌했는데 이 법이 그 이래로 엄격하게 지켜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어떻게 조선정부가 한국의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풍습을 근절했는지에 대
해서 말해주고 있다. 조선정부는 한국의 남성, 여성모두 신라의 천년, 고려의 오 백년 전통
을 통해서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성균형을 강제로 파괴했다. 조선중기 이래로 한국의 남성
여성 모두는 전통적인 성(gender)구조에서 강제로 단절되었고, 중국 주희라는 유학자의 이
질적인 성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어야 했다. 아마 잉화도는 조선초기까지 최후로 한국전통을
유지했던 장소였을 것이다. 잉화도 일화는 조선 땅 전체가 어떻게 유교적 성구조로 전환되
었는가를 말해주는 한 예가 된다. 이것이 한국사회가 전통적인 성구조를 상실하게 된 경위
이다. 결국 16세기말 조선정부가 내국의 여성들을 사회적으로 소탕하고 가정 안으로 몰아
들여서 길들이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명나라와의 전쟁을
건 것이다 (1592). 한국은 이때부터 일본이 일으키는 중국과의 전쟁의 터전으로 전락하는
역사를 만들게 된다. 임진왜란은 약 천 년 전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서 고구려와 백제를
쳤던 한반도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을 한국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유교왕국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정치적 주체성을 잃은, 중국의 속국으로 보일 뿐이었음은 자명
하다. 실상 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하는 조선의 역사가 그렇지 않은가? 신라와 고려의 주체
적인 국제정치는 그 맥을 잃은 것이다.
7년간의 명일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의 유교정치인들은 일본에 대항한 소위 애
국자들을 칭송하기에 급급했다. 김용덕씨는 조선정부는 임진왜란을 겪는 첫 해에 전국을
조사해서 유교적 덕목을 실천한 사람들의 숫자를 기록했다고 쓴다. 효자와 충신, 열녀라
는 항목의 도표는 각각 67, 11, 356명의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유교적인 덕목을 지킨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여성들이었다. 김용덕씨는 일본인들이 조선여성들을 강간하고 폭행했
으며, 여성들은 죽음을 무릎쓰고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많은 여성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강간당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여성들은 자살을 택했는데, 칼로 자결하거나, 높
은 언덕에 올라가 강으로 투신하고, 목매달아 죽었다고 한다. 이 열녀들의 숫자에는 양반가
여성들 뿐 아니라, 서민여성들 그리고 기생들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일본 남자들의 손에 닿는 것보다는 차리리 죽음을 택한 한국의 여성들에게 조선정
부는 "열녀: 한국의 열정적인 여성들"이라는 칭호를 준 것이다. 전쟁의 위협 속에서 결국
한국여성들은 유교적 여성 이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내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조선초기 여성들이 정절을 죽음이라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죽
음을 무릎쓰고 자유로운 성행위를 하면서 조선정부에 반항한 여인들이 그까짓 유교적 정절
을 그렇게 중요시했을까? 그들이 실제로 두려워한 것은 일본인이 가한 잔인한 성폭력이었
고 강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여성들은 한국주권과 전통을 죽기까지 지킨 것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유교적인 국가이념에 충성했다는 의미로 열녀라는 이름
을 붙여준 조선남성들은 다시 한번 더 한국여성들을 모욕하고 배신한 것이다.
13세기, 14세기에 몽고인들에게 징용되었다가, 혹은 일본이나 중국에 징용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들을 "화냥년"이라고 거부한 아버지와 남편들, 친척들이 여성들을
배신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자신은 기생과 첩을 끼고 살면서 조강지처에게는 과부가
되어도 일부종사하라고 강요하는 남편들이 여성들에게 어떤 더 큰 어려움을 끼치는데 주저
했을까? 13세, 15세의 어린 딸을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시댁에다 결혼이
라는 이름으로 팔고, 죽어도 시댁의 귀신이 되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고 가르친 아버지가 딸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이용하는데 두려워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딸에게 글을 가르치면 시집가서 편지하여 문제를 일으킨다고 딸들을 무식자로 남아있게 한
아버지가 딸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딸이 글을 깨우치고 싶어하는
욕망, 자유롭게 문밖을 출입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알고도 무참하게 짓밟아온 아버지들이 도
대체 여성들에 대해서 무엇을 못한다는 말인가? 아버지에게 생명을 바치는 심청이같은 전
설과,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을 위해서 딸을 소경으로 만드는 서편제같은 영화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후손을 만들어낸 조선남성들에게 여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남아있겠는가? 조선시
대 유교남성들을 여성들에게 고향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여성들은 살아서, 그리고 죽어
서도 마음 편히 쉴만한 "집도 절도" 없는 부랑녀로 만들어버린 조선남성들. 한국여성들에
게서 몸과 마음의 집을 빼앗은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아버지요 남편들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치른 조선의 유교관리들은 국제사회에 한국여자들을 팔아서 정치적인
생존을 얻은 것이다. 조선정부는 국제사회에서의 자주적인 정치권 대신에 자국내의 여성들
을 손아귀에 넣어서 성의 정치권을 획득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선비들의 자부심은 비겁
하게 한국여성들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데서 나올 이유가 없다. 그런 남성들
의 자부심은 국제사회에서 그 근거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여성들을 정복한데서
오는 한국남성들의 자부심은 현시대의 한국사회에도 여전히 팽배하지 않은가? 근대사의 한
국 정치, 경제사와 유사함을 느끼지 않는가? 기생관광, 여공들의 저임금과 중노동, 아내의
무보수의 내조, 고아수출 등 국내 여성들의 성과 노동력, 어린이들을 팔아온 한국정치, 경제
사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현시대의 한국사회 남성들의 유아독존적 우월심리는 이런 관점에
서 파악될 때 이해가 된다. 여전히 한국인으로서 주체성을 알 수 없는 정치인들, 학자들,
경제인들이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이 임진왜란에 흔들린 이래 그때의 정
신적인 혼동과 위기가 여전히 소위 한국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맴
돌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강대국을 사대하는 남성우월적 유교문화를
반성하고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벌써 있었을 것이다.

맺음말
현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조선이전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일은 여러 면에서 쉽지 않
다. 그러나 이 장애를 하나씩 제거하는 일은 현재 한국사회의 성(gender)과 성애(sexuality)
문제에 관한 병폐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인들이 한국전통을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만이 한국인들의 미래가 길을 찾는다는 말이
다. 한국인 남성 여성들 모두에게 단절되었던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성균형을 찾아갈 때
얼마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를 상상해보았는가? 여성 전체의 성은 남성들과 더불어
서 사회적 공간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자유를 누릴 것이며, 남성들은 혼자서만 가족의 경제
적인 생존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남성들은 성애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데 사용하
기를 중단할 것이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들의 동
반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한국남성들은 떳떳한 자부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여성들은 결혼하고 자녀 양육하는 일을 넘어서 자아를 실현하는 삶이 어
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성들과 더불어 사회 각분야에서 책임과 의무를 느
낄 것이다.
성애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는 한국사회에 고질적인 많은 성문제들을 풀어줄
것이다. 성애 자체를 긍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제도와 문화가 성애에
대한 금기를 전제로 이룩되었고, 또 세계 대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불교, 유교등의 남성들
의 종교적 가르침이 일방적으로 성애와 여성을 동일시하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서 있다. 그러나 이런 기존 종교의 내부에서
도 성에 대한 고질적 병폐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 시점에서, 가부장문화와 종교를 넘
어서서 성애를 긍정하는 일만이 시도되어야 할 해결책인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여성들만
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단 성애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노력이 시작되면 남녀노소
는 개개인의 삶의 질이 달라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의 얼굴에 행복과 보람의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노인들의 성문제 뿐 아니라, 성폭력과 강간 등에 대한 사회적인 처
벌과 경각심이 늘 것이다. 성애를 감추고 금기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온갖 음성적인 성도덕
행위가 점차로 누그러들 것이다. 고려시대의 한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는 부부는
처가중심 혹은 시가중심의 결혼을 상황에 따라서 선택하고, 또 합의하에 이혼을 선택할 것
이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재산권을 받고 동등한 가장이 되고 자녀들은 모계 혹은
부계의 성을 선택적으로 택하는 날은 불가능하지 않다. 여성들은 무엇보다 여자이기 때문
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게 될 것이다.






앨범 찜목록
같은 옷 구입하기




. 글쓰기 답글 회람 저장 인쇄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Copyright by Daum Communications Corp.











=====================================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출처 : 할미꽃당신 TS16949
글쓴이 : 빙혼서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