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자 “탁록대전”의 현장을 가다)
우리의 기록에 의하면 단군이전 구리국 14대 “치우천자” 시절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었던 “헌원”이 반역도모하자 “탁록”에서
사로잡아 신하로 만들었다
탁록에서 치우군의 부장 81인중 한명인 “치우비”가 공을 성급히
다투다 전사하였는데 중국기록은 이 치우비의 죽음을 치우천자가
전사한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잘못 기록된 이유는 “동두철액” 에 기인하는 것으로 즉 81명의 부장이
동일한 복장을 하여 오인한 것이다
"동으로 된 소뿔투구와 철가면, 철기로 된 병기”를 가지고 전쟁에
임하니 81명 장수가 모두 치우천자로 보인 까닭이라
탁록의 무덤은 치우천자의 무덤이 아니라 전공을 다투던 부장 “치우비”의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치우천자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
▒ 탁록 지명도
- 탁록 : 치우천자와 황제헌원의 전쟁지역 (중국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
- 동평 : 치우천자의 무덤 위치
- 거야 : 치우천자 부인 견비의 무덤 위치
- 황릉 : 헌원의 무덤 (척박한 산악지대 이다)
- 수구 : 황제가 태어난 곳 (옥토이다)
▒ 김산호 화백의 “탁록대전도”
▒ 치우문(蚩尤汶)
- 치우천자가 타던말과 무기들을 묻었다고 전해지는 무덤
▒ 치우북채(蚩尤北寨) 표지석
- 치우천자가 진을 쳤던 북쪽요새가 있었던 자리 표시
- 북채외에 중채, 남채가 있다
▒ 치우북채(蚩尤北寨)의 동쪽 흙벽
- 거의 침식되어 뼈대만 남은 흙담을 기대고
- 고목이 되어가는 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현장을 지키고 있다
▒ 치우북채(蚩尤北寨)의 동북쪽 모서리
- 망루가 세워진 듯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뚫려져 있고
- 그 아래로 시가지가 질서정연하게 조성되어 있다
▒ 치우천(蚩尤泉), 치우송(蚩尤松)
- 치우북채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치우천과 치우송
▒ 치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 그림중 자그마한 하얀비석이 보인다
- 비석 주변 나무가 있는 곳이 치우묘(부장 81인중 치우비)로 추정되는 곳
▒ 치우북묘
- 2개의 나무사이에 치우의 사당(치우비의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백색의 무자비
- 치우묘의 표지석으로 알려진 무자비는
- 싸움에서 패한 치우(치우비)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 부하들이 몰래 묘를 써야했고
- 때문에 비문을 남길수 없어 “무자비”로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탁록 “삼조당”속의 치우천자)
▒ 탁록 “삼조당(三祖堂)” 전경
-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현 황제성 구역 안에 있다
▒ 삼조당 정문 “귀근원(歸根苑)”
- 귀근원은 황제성 구역의 대문격으로 앙소문화시기의 건축양식을 띄고 있으며
- 57개 소수민족을 망라한 13억 중국인들의 단합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 삼조당내 “치우천자상”
- 좌측이 치우천자, 우측이 염제, 중앙이 훤원이 모셔져 있다
▒ 삼조당내 “치우천자 벽화”
- 치우천자는 오른손에 도끼를 들고 있는 강인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 열 지어선 무사들은 도끼와 창 그리고 쇠뿔투구를 쓴 모습이 보이며
- 치우기에 그려진 소머리도 보인다
- 치우 3채, 즉 북채, 중채, 남채의 모습이 보이고 각 채마다 치우군의
특징 묘사되어 있다
- 중채는 지휘
- 후채는 보급
- 전채는 전방진지를 맡았다
- 주요내용은 “야금주정(冶金鑄鼎)”
(끝)
출처:치우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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